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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 이상진(李尙眞)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450

이조의 청백리(淸白吏) 이상진(李尙眞)은 1641년 (光海君 6년)에 태어나 86세를 일기로 1690년(연종 16년)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천득(天得)이요, 호(號)는 금강(琴岡) 또는 만암(晩庵)이라 하였고, 본관의 전의(全義)이다. 그는 참봉(參奉)을 지낸 이영광(李榮光)의 아들로, 1645년(인조 2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였다.
그는 곧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연풍현감(延豊縣監)·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歷任)한후, 1645년(孝宗 5년) 다시 정언(正言)이 되어 국정(國政)에 대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현종(顯宗)때 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촉진하는 한편 〈吏道〉를 확립, 피폐한 정사를 바로 잡았으며, 1673년(顯宗 14년)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그후 공조판서(工曹判書)·판의금부사(判義禁付事)·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는데 1680년(연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되었다가 서인(西人)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을 탄핵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史)·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 실질적으로 정치 참여를 할 수 없는 한직(閑職)을 역임하였다.

1689년(연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시에 왕비의 폐위를 극간(極諫) 하다가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流配)된 북청(北靑), 강원도 철원(鐵原) 등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부(扶)여(餘)에 돌아와 죽었다.
1692년(연종 18년) 왕비가 복위되자 숙종은 후회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1695년 청백리(淸白吏)로 선출 하였고 전주(全州)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웠으며, 1708년(연종 34년) 북청(北靑)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 노(老)덕(德)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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