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내용
- 김용담 호랑이
- 망건장 임덕수
- 병자호란을 예견한 구영
- 임진왜란 추수경
- 박진과 박과산
- 명필 창암 이삼만
- 한말 의사 국영환
- 박학다식 명간 임윤성
- 전라기인 이거두리
- 벌 명당과 발산 소씨
- 청백리 이상진
- 신창 권삼득
- 독립의사 전태순
- 시문에 뛰어난 홍남립
김용담 호랑이
완주군 鳳域땅, 현재 비봉면은 고산의 古邑址로서 高山縣이 현 고산읍내로 읍 자리를 이전하기 전에는 縣名을 鳳域이라 불렀다. 그 증거로 현 비봉면에 가면 들 가운데 玉畓이니 域內畓이니 하는 논이 있어 옛날 官衙가 있던 터를 논으로 개간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논 가운데서 기와조각과, 주춧돌조각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한다. 봉성현이 廢縣이 되고 다시 雲梯縣으로 바뀌었으나 그마저 高山縣으로 되고 말았다. 여기에 나오는 전설은 봉성현 시대의 이야기로 이 고장에 김용담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용담이라는 이름은 그가 일찍이 龍潭縣監 역임한후 고향에 돌아와 살 때,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김용담은 천품이 온후하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서 퇴관하자 고향에 돌아와 가사를 살피는 동시에 과부인 모친을 위하여 정성껏 봉양했다. 그런데 그의 모친이 우연히 원인모를 병에 걸려 신음하자 용담의 정성어린 간호와 始藥에도 불구하고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더욱 심해 갈 뿐이었다. 그런던 중 한 의원이 말하기를 개의 간 천개만 먹으면 완쾌되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들은 용담은 원래 효성이 지극한 인물인지라 다방면으로 연구궁리해 보았으나 개의 간 몇 개라면 구할 수가 있어도 천개는 도저히 구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아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고자 비장했던 술법을 써서 그 날부터 호랑이로 화신(化身)하여 개를 잡아 간을 구하여 모친을 봉양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밤마다 주문을 읽고는 호랑이로 변하여 개의 간을 구해 온 뒤에는 다시 주문을 읽어 사람이 되기를 여러날 거듭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내가 생각하기를 아무리 모친의 병구원도 중요하지만, 그와 같은 남편의 몰골이 보기 싫어서 하루는 남편이 주문을 읽고 호랑이로 변해서 집을 나간 뒤 남편이 두고 간 주문을 없애버리면 다시는 호랑이로 변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주문책(呪文冊)을 꺼내다가 없애 버렸다. 개의 간을 구해 가지고 집에 돌아온 용담은 다시 인도환생을 하고자 주문책을 아무리 찾아보았으나 없애버린 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호랑이가 된 그래도 집을 나가 개만 잡아 들였으나 자기가 이렇게된 것이 아내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자기 아내를 죽였으며, 동물들은 물론, 사람에게 까지 피해를 주었다. 관아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하루 속히 이 호랑이를 잡아 없애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그가 왕래하는 통로에 덫을 수없이 놓았으나 쉽사리 덫에 걸리지 않고 피해 다녔다. 이것은 자기 남편에게 죽음을 당한 그의 아내가 남편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죄를 뉘우치고 호랑이가 된 남편을 따라 다녔으므로 호랑이인 남편은 덫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좀처럼 잡을 수가 없으므로 관아에서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하루는 덫을 놓고 지키기로했다. 그랬더니 한 여인이 그 곳을 지나면서 덫을 걸어서 한 쪽에다 놓고 가므로 이것을 목격한 관노(官奴)는 여자가 통과한 바로 뒤에 또 처음같이 놓았더니, 얼마후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 덫에 걸려 잡히고 말아 그 후로는 호랑이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고산지방에는 지금까지도 어린아이가 울면 ‘김용담 호랑이를 데려 온다’고 하면 어린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전해진다.
망건장 임덕수
한평생을 오직 한가지 일, 망건(望巾) 제작에만 몸을 바치고 말총 한올 한올마다에 장인의 영혼을 불어 놓은 장인(匠人) 임덕수는 전국에서 유일한 망건장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제66호였다. 1903년 태어난 이래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381번지에서 줄곧 살아왔다. 전주에서 봉동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로 익산인터체인지 쪽으로 비포장도로를 타고 4㎞쯤 가다보면 야산 줄기가 길게 뻗어내린 곳에 토담으로 겨우 몸채를 의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옛 농촌 가옥이 있는데 이곳이 임덕수가 태어나 한많은 한평생을 마친 우리나라 최고의 망건이 만들어진 곳이다.
임덕수가 망건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가 13세 되던 해 1916년 4월 20일의 사건 때문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그날 어린 나이에 땔나무 해오다 마을 뒤편 방죽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하면서 다시는 지게를 지지않겠다고 다짐하고 어머니로부터 망건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친정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솜씨로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망건장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매일 같이 자상하고 섬세한 가르침을 받은 임덕수는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에다 손 끝에 피가 터져 나오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10년 뒤에는 전국에서도 인정받는 기술을 얻었다.
1930년대의 망건 한 개 값은 쌀한가마니와 맞먹는 5원이었으며 한달에 5개 또는 6개씩은 만들어 팔 수 있었으나 논밭 한평 없는 처지에서도 생계에 다소 여유가 있기도 했다. 특히 추석이나 설명절 무렵에는 수요가 많아 주문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지금은 쓰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현대문명의 뒷켠에서 골동품으로 인식이 되어가는 망건이지만, 당시에는 밥을 굶어도 망건을 써야 했던 소중한 물건이었으며 남자들의 권위가 가득 담긴 상징적 의미도 있는 선비들의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망건 만드는 일이 당시의 직업 가운데서 괜찮은 생업이기도 했다.
망건은 관(冠)과 입(粒), 탕건(宕巾) 속에 두르는 것으로 왕과 왕족은 뒤에 비취관자를, 정3품이상의 양반은 금관자를 종3품부터 종9품까지는 수각(獸角)관자를, 그리고 천민과 상민들은 짐승뼈의 관자를 달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망건 위에 관을 쓰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망건이 관을 겸하게 돼있어 그 위에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손끝으로 80여년 삶을 다스려온 그는 1985년 1월 25일 85세의 나이로 외고집 인생을 맺었다. 생전에 막내며느리 강점순씨등 3명의 제자가 그에게서 망건 제작 기술을 전수 받으며 뒤를 잇대고는 있지만, 갈퀴같이 굳은 손으로 5백년 전통을 살려내는 마지막 망건장의 솜씨는 다시 볼길이 없다.
병자호란 발발(勃發)을 예견한 구영(具塋)
구영(具塋)선생은 1584년(宣祖12년) 고산현(高山縣)에서 능성(綾城)구씨 대윤(大倫)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영연(塋然)이고 호(號)는 죽유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때의 공로로 호종공신(扈從功臣)에 봉해졌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회인현(懷人縣) 현감(縣監)을 지낸 인조(仁祖)때의 문관(文官)이다. 문원공(文元公)밑에서 학문닦아선생은 당시 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 그는 말과 행실을 조심스럽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인 김장생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후에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한 결과 선생은 29살 되던 해인 1612년(光海君 4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618년(光海君 10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자는 논의가 간신배들에 의해 대두되자, 전주(全州)에 살던 유응원(柳應元)이라는 사람이 글을 지어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분격하여 유생들을 모아 향교(鄕校)에 들어가 이에 반대하는 글을 지어서 인목대비를 폐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규탄하였다. 선생의 형은 선생의 행동이 옳다고 긍정했으나, 그의 친척들은 모두 나서서 이같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닥쳐올 화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말렸다. 일이 이처럼 되자 선생은 할수 없이 더 이상의 행동은 삼가게 되었으나, 유응원의 지지문을 구해 불을 살랐다.
임진강 건너오는 쥐떼보고 병자호란 예견 1630년(仁祖 8년)에는 사과(司果)벼슬을 받았다. 그 해는 수 많은 쥐떼가 임진강을 건너오는 이변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쥐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생물인데 간지(干支)로 보면 지지(地支)중의 자(子)에 해당된다. 그리고 쥐떼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왔는데, 남(南)이라는 방위는 천간(天干)중에서 ‘병(丙)’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쥐떼가 임진강을 건너온 이변은 아마도 병자(丙子)년에 오랑캐의 내침(來侵)이 있으리라는 징조가 아니겠는가?”라고 예견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6년후, 병자년인 1636년에 그가 예견한 바와 같이 외란(外亂)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었다.
망건은 관(冠)과 입(粒), 탕건(宕巾) 속에 두르는 것으로 왕과 왕족은 뒤에 비취관자를, 정3품이상의 양반은 금관자를 종3품부터 종9품까지는 수각(獸角)관자를, 그리고 천민과 상민들은 짐승뼈의 관자를 달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망건 위에 관을 쓰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망건이 관을 겸하게 돼있어 그 위에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병자년이 되어, 호란이 일어났는데 소식에 접한 선생은 즉시 집안일을 정리하고 나서 의병장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의 막하에 들어갔다. 정홍명은 유명한 정철(鄭澈)의 아들로서 선생과 같이 김장생의 제자였다. 선생은 정홍명의 막하에서 군무에 힘쓰면서도 항상 위기에 처한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걱정했다.
임진왜란때 큰 공 세운 추수경
선생은 1529년에 태어나 1600년(선조 33년)에 죽었다. 그의 자는 청하이며, 호를 세심상이라 하였다. 그는 추계 추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선대는 중국 송나라 소흥 연간에 중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함흥 연화도로 이주 하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수경은 오현군 성덕산 칠성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才藝가 뛰어나고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그의 나의 1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년)에는 중국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使)가 되었다.
그가 무강자사가 된 다음 해인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되자 그는 당시 명나라 구원병 이여송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그동안 통솔하고 있던 무강병사 5만명을 이끌고 1592년 12월25일 압록강을 건너 당시 왜적의 진지가 있던 곽산의 적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싸움에서 왜적에게 패하게 되자 개성으로 들어가 구원병을 청하고 흩어진 병사를 다시 규합하여 당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진주성으로 갔다. 그런데 진주성 전투에서 당시 조선군 지휘자 황진이 전사하고 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그는 왜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다시 전투지를 동래로 옮기었다. 그는 동래로 군대를 진격시켜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목을 마치 마대를 자르듯이 베었다. 그는 일찍이 그의 다섯 아들에게 훈계 하기를 『지원효충일대신(只願孝忠一代臣:다만 바라건대 효도와 충성을 하는 일대의 신하가 되라.)』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다섯 아들은 아버지 수경의 훈계를 지켰던 것이다. 그는 임진·정유 양 왜란이 끝나고 비교적 평온을 되찾게 되었던 1600년(선조 33년) 전주로 돌아와 그 해 9월 9일 그의 나이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당시 정부는 그의 상례에 필요한 물품과 제물을 준비하여 보내고 이정란(李廷鸞) 장군으로 하여금 상례를 성대히 치르게 하였다. 한편 조정은 그에게 정란공신의 훈을 내리게 하였다.
그가 죽은 뒤 다섯 아들들이 그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를때까지 까치 한쌍이 그의 묘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또한 호랑이 두 마리가 매일밤 여막을 지켜 주었고 여막 앞 땅에 있던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3년상을 마칠때까지 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는 완주군 소양면 만덕산에 있다. 그의 묘소 옆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전가선대부궁내부부첨사(前嘉善大夫宮內府副詹事) 김병길이 글을 짓고, 글씨는 전숭록대부행이조판서원임규장각(前崇祿大夫行吏曹判書原任奎章閣) 윤용구가 썼으며, 비석의 뒤부분의 전서는 가선대부전향산수(嘉善大夫前香山守) 윤영구가 썼다.
박진과 박과산
지금의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에 박과산(朴菓山)이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하나 있었다. 그 밑에는 수박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수박동 마을엔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겨우 웅덩이 구실도 못하는 잉어소라는 소가 개울물로 졸졸졸 흐르고 있다. 이 마을이 수박동으로 이름이 지어지고 앞 냇가에 조그맣게 파여진 웅덩이가 잉어소라고 불리어지고 있는데는 그럴법한 옛날 어떤 효자의 애틋한 정신이 연연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5백여년전의 일이었다. 전주 사람으로 박진(朴晋)이란 사람이 있었다. 박진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글읽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가 커서 훌륭한 벼슬길에 오른 것은 뻔한 일이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글 잘하면 그때는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진이 전라남도 어느 고을의 원님으로 가게 되었다. 원님이 된 박 진은 한시도 늙은 부모를 잊을수가 없었다. “밥이나 굶지 않았을까? 잠자리가 편할까? 나쁜 일로 걱정거리나 생기지 않았을까?” 매일 같이 부모님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벼슬이 높은데에 이르렀으나 부모의 곁에서 부모를 섬기지 못하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불효자식이 어찌 나라의 일을 걱정할 수가 있고 올바르게 처리할 수 가 있단 말인가?” 어느날 저녁 박 진은 잠을 못 이루고 부모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천만 뜻밖에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간단한 전갈이 박 진의 앞으로 날아왔다. 박 진은 눈물을 흘리며 애를 태웠다. 부하에게 사표를 내게하고는 허겁지겁 말을 달려 전주로 향했다. 어찌나 황급히 서둘렀는지 박 진은 의복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잠옷 바람으로 몇 백리를 단숨에 달렸다. 그때 삼남지방에서는 철아닌 비가 내려 곳곳에서 물난리가 여간 아니었다. 박 진이 전주에 도착했을 땐 냇물이 너무나 많이 불어나 도저히 말을 타고는 냇물을 건널 수가 없었다.
박 진은 말 위에서 한탄했다. 야속하게도 하늘이 효심을 가로막고 있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냇가 제방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 나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아수성을 치고 있었다. 얼마동안은 사납게 흐르는 물결이 원망스러워 바라만 보고 있던 박 진은 말을 채찍질해 물결속으로 뛰어들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매인 것, 부모님께 효성을 못할바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박 진의 무모한 행동에 많은 사람들은 혀를 찼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사납게 흐르던 냇물이 금방 제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닌가. 박 진은 쉽게 건널 수가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하늘이 돕는 큰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진이 그 길로 집엘 도착하니 늙은 부모들도 신기해 했다. 박 진은 벼슬을 그만 두고 왔다는 말을 부친께 알리고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박 진의 나이 예순이 훨씬 넘었으니 부친 나이야 이젠 사람의 목숨으론 더 지탱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부모를 모시는 박 진의 마음은 너무 지극하다 못해 미친 것과도 같았다.
어느날 부친은 박 진에게 말했다. “진아, 내가 왜 이렇게 수박이 먹고 싶은지 모르겠구나.” “아버지, 염려마십시오. 어떻게든지 구해 오겠습니다.” 박 진은 쉽게 대답은 했지만 때가 엄동설한인데 어디에 가서 수박을 구한단 말인가? 부친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심코 대답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부친이 수박을 먹고 싶다니 가만히 누워 있을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박 진은 지난 여름에 수박농사를 지은 논을 다 뒤져 보았지만 눈속에 수박이 있을리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어떤 마을 어귀를 지날 때였다. 양지바른 곳에 수박잎이 파랗게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박 진은 그만 반가운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거기엔 조그만한 수박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이었다. 겨울에 수박을 본 부친은 그렇게 반가와 할 수가 없었다. 도 며칠이 지났다. “진아, 이젠 잉어가 자꾸만 먹고 싶구나” “아버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곧 잉어를 잡아 오겠습니다.”
겨울에 잉어를 잡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것은 뻔히 알고 있는 박 진이었지만 조금도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고 냇가로 나갔다.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냇가는 쇠망치로도 도저히 얼음을 깰 수가 없었다. 또 깰 수가 있다해도 잉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박 진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박 진은 무심결에 지난번 수박을 구했던 마을 어귀에왔다. 거기엔 조그마한 웅덩이가 얼음 하나 얼지 않은 채로 잉어가 수십 마리 헤엄치고 있었다. 아! 하늘이 무심치 않았구나. 박 진은 몇 번이고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잉어를 잡아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부친은 반가와 어쩔 줄 모르며 맛있게 잉어를 먹었다. 부친의 병환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온 집안 식구들은 다시 환한 웃음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 박 진이 잉어를 구한 연못을 잉어소, 수박을 얻은 마을 이름을 수박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명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우리 고장이 낳은 명필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은 우아한 문장과 풍요로운 생활에서 법통있는 글씨를 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무르녹은 경지에서 청아한 일생을 마친 분이었다. 당대에 명필로 천명되어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인데도 공기골(孔洞?孔基?孔器) 같은 맑은 산골에 묻혀 살면서 자연을 상대로 품성 높은 차원에서 글씨를 연마했다. 그러므로 그의 서도는 심오한 사상과 고고한 경지에서 이뤄졌기에 저속한 안목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더불어 높은 수준에서 평가되어야 하고 우리나라 서도의 청맥을 찾아 낼 수 있어 글씨쓰는 사람들의 정신과 자세에 귀감이 되리라 믿는다.
상관면 죽림리에서 서쪽으로 나가 상관천을 건너면 공기골에 들어선다. 이삼만은 중년이 되자 이 골짝에 찾아 들어와서 그윽한 묵향속에서 필봉을 가다듬어 유수체를 이룩하였고 청고한 사상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 그의 관향은 전주로 젊었을 때 이름은 규환이었다.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는 것이다. 자는 윤원이요, 호를 창암이라 했는데 젊었을 적에는 강암(强巖)으로도 불리웠다. 그는 1770년(영조 46년)에 전주 자만동(현 교동)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때 정읍 불무곡에서도 거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글씨 쓰기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돌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점점 살림이 치폐되어 중년에는 공기골에 들어가서 처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독사에 물린 여독으로 작고하게 되자 그는 뱀이란 뱀은 눈에 띄는대로 잡아 죽이었으니 뱀막이로 이삼만이라 써 붙이면 뱀이 끓지 아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의 나이 53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했는데 슬하에는 딸만 셋이었고 가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77세 때 쓴 그의 서첩(書帖)에 의하면 우리나라 명필인 김생(金生)과 한호(韓濩) 같은 분을 추켜 올렸으니 그의 주체성을 살필 수 있는 것이요 글씨의 변천된 과정과 더불어 글씨쓰는 법통을 밝혀냈고 글씨쓰는 자세를 구명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을지라도 하루에 천자를 썼으며 늘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했다.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면 한획 한점을 각각 한달씩 가르쳤다.
어느 분이 소장한 서첩에 의하면 해서(楷書)를 쓰는데 숙달하게 되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절로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여 글씨는 해서에 기초를 둬야 한다고 되풀이 했다. 또한 글씨쓰는 사람들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옛날 장해동이란 사람이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났으나 그가 죽고나서 배척된 고사(古事)를 들어 글씨쓰는 법도에 있어 후진들을 경계했다. 글씨는 도(道)의 경지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으로 인품이 고결한 연후에야만 묘경(妙境)에 들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글씨는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하고 소박한 기풍을 본받아야만 될 것으로 속기(俗氣)에 접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1847년에 향년 78세의 고령으로 주옥같은 맑은 일생을 마치고 구이면 평촌 하척부락에 묻혔다.
한말 의사(義士) 국영환(鞠榮煥)
국영환(鞠榮煥)은 서기 1871년(고종 8년)현재의 화산면(華山面) 운곡리(雲谷里) 봉산에서 출생하여 1939년에 죽었다. 그의 자(子)는 영화(永化)요, 호는 곤암(坤庵)이다. 그의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당시 어장(御將) 조영하(趙寧夏)에게서 병서(兵書)를 배웠다. 1894년 당시 일본세력이 점차로 우리 나라에 침투해 들어오므로써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정권이 득세 하였으며 이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면서 친일파가 완전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원군이 다시 등장 일본을 견제 하고자 러시아에 접근하므로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궁궐을 방화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더구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궁궐을 불법으로 침범하고 특히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손에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가 죽게 되자 국영환은 이에 격분, 일본인에 대항하여 항거했고 뒤에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군(東學軍)에 가담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을 누비며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당의 전국 체포령과 아울러 그를 수배 체포하게 하였다. 그는 이를 피하여 중국 심양(瀋陽)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독립운동을 꾀하고자 비밀리에 귀국 하였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박학다식(博學多識)했던 명간 임윤성(任尹聖)
선생의 자는 상경(商卿)이요, 호는 숙계(淑溪)이다. 1547년(명종 2년)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후릉참봉을 지낸 임천수(任千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고려조 좌복야문하시중을 지낸 임덕생(任德生)은 그의 7대조이며 비조(鼻祖)이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일찍부터 독서를 즐겨 학행(學行) 양면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깊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공양을 잘 하였으며 모친이 병환에 들었을 때는 한겨울에 냇물에서 가물치를 구해다 올리는 등 효행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선생은 청년시절에 이미 육경(六經)에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설렵하여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 이름나있었다. 1579년 그의 나이 32세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었으며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공부를 힘썼으니,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서애(西涯) 유성용(柳成龍)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성균관 유생의 반열에서 선조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신의주까지 갔으며 이 공로로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다고 하나 실은 그의 평소 효심과 학행문장 재덕(才德), 그리고 강명정직(剛明正直)한 인격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략 까지를 높이 산 중신들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를 추천한 사람은 좌의정 유성용을 비롯하여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이정구(李廷龜) 응교(應敎) 신흠(申欽)등이었다. 한편 선생은 관하 백성들중에 효자?절부(節婦) 행의자(行誼者)가 있으면 몸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직접 포상하고, 자신을 청렴으로써 몸가짐을 하면서 이속(吏屬)들을 단속하니 그의 송덕(頌德)이 자자하게 인근 읍내까지 미풍(美風)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이 거창에 부임한 지 반년만에 뜻밖의 병을 얻어 사직도 못한 채 1608년 1월 별세하니 고을 사민(士民)들이 매우 슬퍼 히였으며 다음해 정월 고향으로 운구하여 내관동(內寬洞) 선영 아래 안장 하였다고 전해진다.
전라기인(全羅奇人) 이거두리(李普漢)
상관(上關)면 죽림(竹林)리 동네 길가에는 허술한 비석 하나가 서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면(碑面)에는 『이거두리 송덕비』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으나 웬일인지 조국 해방 후에는 자취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거두리 비석은 구차한 사람들과 걸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한 푼 두 푼이 모아져서 세워진 것이라는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우리 고장을 흐뭇하게 하는 빛나는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전라기인(全羅奇人) 이거두리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도 연로(年老)한 사람은 이야기 거리로 남아 있으나 잘 모르는 사람은 양광(佯狂)을 부린 사람 정도로 받아 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목천포(木川浦) 당메(唐山) 부자인 경호(敬鎬)의 아들로 김해 김씨(金海 金氏)를 모친으로 1873년 태어났으니 이름을 보한(普漢)이라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입버릇처럼 부르고 다녔던 거두리라는 노래의 후렴과 참봉(參奉)이라는 경칭(敬稱)을 붙여 거두리참봉이라 불렀다. 거두리란 뜻은 거둬들인다는 말로 잃어버린 나라를 수복(收復)하자는 뜻이려니와 거둬 모인다는 뜻으로 민족이 단합되자는 말이어서 그는 더욱 신나게 불렀던 것이다. 그는 3.1운동때 서울과 수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구금되었고 거듭 천안에서도 부르다가 옥살이를 했다. 그러한 항일투쟁에서 그는 양광을 부리기 시작하여 일본 경찰로부터 광인으로 지목 되었으니 옷고름을 매지 않고 모자를 구멍 뚫어 거꾸로 쓰고 다녔다. 마침내 그는 체념된 상황에서 우리 겨레가 남은 것이란 민족 밖에 없다는 신념에서 일생을 사랑에 바친 것이었다.
청빈한 생활로 지내다가 완산동에서 세상을 뜨니 가난한 사람들과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그의 덕을 추모하던 인파로 상관(上關)골짝을 메우게 되었으며 만사(輓事)의 기폭으로 좁은 목을 물들였다. 상관면 색장리에서 뜨거운 눈물로 장사를 지냈다.
벌 명당과 발산 소씨
완주군 이서면 이문리 산정부락에는 명당(明堂)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금부터 3백여년 전 이곳 명당리에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씨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산에 밭을 일구어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는 어려운 살림중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단란하게 살아갔다. 다만 슬하에 자녀가 없는 것이 한가닥 아쉬움 이었다. 부모가 세상을 뜨자 효심이 지극한 이들 부부는 돌아가신 부모를 좋은 묘소에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래서 뒷 뜰에 단을 모셔 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서 명당자리를 찾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나가던 도승(道僧)이 해는 저물고 갈곳이 없다며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부부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정성을 다해 도승을 대접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도승은 산에 올라 산세(山勢)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몇날 며칠이 되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산에 올라 산세만 살피는 것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조금도 싫은 낯을 하지않고 어려운 형편에서나마 지성을 다해 도승을 모셨다. 하루는 도승이 주인을 부르더니 『당신들의 정성에 정말 감탄했오. 당신들의 그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묘자리를 하나 구해 주겠오』하고 말했다. 도승은 너무도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는 주인을 데리고 산을 가더니 묘자리를 하나 일러 주었다. 『이 곳에 묘를 쓰시오. 이곳은 벌 명당이라는 혈(穴)이요.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멍덕(벌통을 말함)봉이고 바로 앞의 날줄기가 꽃날봉이요. 그 밑은 젖샘이고 옆에 있는 날줄기는 연모(연꽃밭)당이요』 이렇게 산세를 하나하나 설명한 도승은 『이곳에 묘를 쓴 뒤에는 멍덕복의 멍덕(벌집)이 나오도록 허물어 주시오. 멍덕이 흙으로 덮여서 벌이 나오지를 못하니 흙을 헐어야 벌이 나와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오. 그러면 벌들이 꿀을 모아서 멍덕에 저장하고 새끼를 많이 치게 될 것인즉 이곳에 묘를 쓴사람도 자손이 번창하고 재물도 왕성할 것이요』하고 말했다.
도승이 떠나자 이 부부는 너무나 기쁘고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벌명당에 부모의 묘를 쓰고 멍덕봉의 봉우리를 헐어 버렸다. 그러자 이곳으로부터 수 많은 벌떼가 나와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여겨 벌떼를 따라가 보니 십리도 채 못간 곳에 도승이 벌에 쏘여 죽어있었다. 부부는 도승의 시체를 부모의 묘와 나란히 모시고 도승이 일러준대로 북쪽 30리밖인 익산(益山)군 금마(金馬)면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부부는 도승이 말한 것처럼 지금껏 없던 자녀를 얻고 대대로 일가가 번창해서 거족(巨族)을 이루게 되니 이들이 지금의 발산(鉢山) 소(蘇)씨요, 벌명당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청백리(淸白吏) 이상진(李尙眞)
이조의 청백리(淸白吏) 이상진(李尙眞)은 1641년 (光海君 6년)에 태어나 86세를 일기로 1690년(연종 16년)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천득(天得)이요, 호(號)는 금강(琴岡) 또는 만암(晩庵)이라 하였고, 본관의 전의(全義)이다. 그는 참봉(參奉)을 지낸 이영광(李榮光)의 아들로, 1645년(인조 2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였다. 그는 곧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연풍현감(延豊縣監)·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歷任)한후, 1645년(孝宗 5년) 다시 정언(正言)이 되어 국정(國政)에 대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현종(顯宗)때 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촉진하는 한편 〈吏道〉를 확립, 피폐한 정사를 바로 잡았으며, 1673년(顯宗 14년) 우참찬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그후 공조판서(工曹判書)·판의금부사(判義禁付事)·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는데 1680년(연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되었다가 서인(西人)이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에 속하여 노론을 탄핵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史)·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 실질적으로 정치 참여를 할 수 없는 한직(閑職)을 역임하였다.
1689년(연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시에 왕비의 폐위를 극간(極諫) 하다가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流配)된 북청(北靑), 강원도 철원(鐵原) 등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부(扶)여(餘)에 돌아와 죽었다. 1692년(연종 18년) 왕비가 복위되자 숙종은 후회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1695년 청백리(淸白吏)로 선출 하였고 전주(全州)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웠으며, 1708년(연종 34년) 북청(北靑)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 노(老)덕(德)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신창(神唱) 권삼득(權三得)
인간의 음성으로서 그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예술의 세계를 두루 섭렵한 선생은 신창(神唱)의 경지에까지 이른 우리나라 8대 명창중의 한 분이었다.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 등 세가지 소리를 터득했다하여 스스로 삼득(三得)임을 자칭한 선생의 본명은 정이었다. 안동 권씨 양반가문 권래언의 둘째 아들로 1771년(英祖 47년)에 태어난 선생의 출생지는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반상(班常)의 계급 구별이 엄격했던 때에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타고난 재질을 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자연의 서기가 감도는 심산유곡, 거기에 떨어지는 장쾌하고 웅장한 폭포소리를 견주며 수련의 나날을 보낸 선생은 피를 토하고 살을 깎아내는 각고의 노력 끝에 명창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가풍(歌風)은 높고 크게 외치는 소리로서 가락은 판소리 동편제에 가까운 중고제로서 특히 소리의 위아래가 분명해, 듣는 이로 하여금 씩씩하고 명쾌함을 느끼게 했다. 선생의 드렁조 가락은 흥부가에서 특히 뛰어났다. 놀부가 가노(家奴)들을 데리고 제비사냥 하는 장면이 원형인데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히 신창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불우한 한 세대를 살았던 선생에 대한 기록은 희미하고 다만 오늘날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선생은 1841년(憲宗 7년) 그의 나이 일흔 하나가 되던 해 소리를 놓으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용진면 구억리 이목정 양지바른 산기슭에 소리구멍과 함께 조용히 잠들어 있는 선생은 분명 창(唱)을 위해 태어나서 창과 더불어 살다간 위대한 예술인 이었다.
독립의사(獨立義士) 전태순(全泰順)
전태순(全泰順)은 1885년(고종 22년) 4월 8일 봉동에서 전좌현(全佐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처음의 이름은 태섭(泰燮) 자(字)를 창여(昌汝)라 하였으며 호를 의당(義堂)이라 하였다. 그의 벼슬은 9품(九品) 종사랑(從仕郞) 임중추원의관(任中樞院議官) 서주임관(敍奏任官) 6등(六等)을 거쳐 창릉(昌陵)의 정자각(丁字閣)을 개수(改修)할 때 그 공사의 감독을 맡아 특별한 공을 세움으로써 정3품(正三品)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이루어지자 그는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봉동으로 돌아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 그 뒤 그는 고향에서 당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지도·지휘하던 손병희(孫秉熙)·이인환(李寅煥)·신석구(申錫九)·강덕기(康德基)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활동계획 및 상황을 들었다.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각 고을에 배포할 책임을 부여 받아 각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배포하고 민중들로 하여금 일제히 봉기(蜂起)할 것을 선동 하였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전국 각처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그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일본에 대한 원한을 풀고자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하다 불행히 일본 헌병들에게 붙들렸다. 그는 그들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오히려 일본 헌병을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대한의 국민으로서 의리(義理)를 취하려는데 너희들은 나를 강제로 굴복시키려 하느냐, 원흉의 머리를 베어 나라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계속 싸우겠노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2년의 형(刑)을 언도받아 고양군(高陽郡) 공덕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복역을 마치고 고향 봉동으로 돌아와 봉실산(鳳室山) 속에 머물면서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그 뒤 해방을 맞이하여 남은 여생을 봉동 봉실산 아래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1년 1월 18일에 세상을 하직 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홍남립(洪南立)
선생은 1606년(宣祖 39년)2월 26일 완주 구사리(九思理)에서 홍택(洪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탁이(卓爾)이고, 호를 화곡(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교우(交友)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6경(六經)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633년(仁祖 1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하였다. 그 뒤 그는 벼슬길에 올라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거쳐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성균관학유·학정·박사·전적(成均館學諭·學正·博士·典籍) 등을 역임한 뒤 임금의 특별 배려에 의해 자기의 집에서 쉬면서 책을 복 수 잇는 사가호당(賜暇湖堂)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며,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을 거쳐 광양현감(光陽懸鑒)·만경현령(萬頃縣令)·평안도사(平安都事) 보성·서산·덕산 군수등의 외직(外職)을 거쳐 형·병조좌랑(型·兵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 등 숱한 내외(內外)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효행도 남달리 깊었는데 그의 부모가 돌아가심으로 묘소 옆에 여막을 3년복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러하였으니 친구와의 우의(友誼)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친구 백석(白石)유집과 함께 과거를 보러가서 시아우들이 일찍기 죽자 그들이 낳은 아들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들처럼 돌보아 주었으며 항상 자신의 아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은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자녀들의 강학(講學)에 힘썼다. 또한 그는 문인(文人)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문인들이 시(詩)와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항상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잘못된 곳을 올바른 지적을 해주었고, 잘된 곳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선생은 문인(門人)과 자녀들을 강학하는데 힘쓰다가 1679년 세상을 뜨게 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의 묘소는 완주 대승동(大勝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덕행(德行)과 학행(學行)을 기려 학천사(鶴川祠)와 대승사(大勝祠)를 짓고 여기에 그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선생이 저술한 많은 문집(文集)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