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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다식(博學多識)했던 명간 임윤성(任尹聖)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595

선생의 자는 상경(商卿)이요, 호는 숙계(淑溪)이다. 
1547년(명종 2년) 고산 주남동(周南洞)에서 후릉참봉을 지낸 임천수(任千壽)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이며 고려조 좌복야문하시중을 지낸 임덕생(任德生)은 그의 7대조이며 비조(鼻祖)이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일찍부터 독서를 즐겨 학행(學行) 양면에서 사람들의 선망이 깊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공양을 잘 하였으며 모친이 병환에 들었을 때는 한겨울에 냇물에서 가물치를 구해다 올리는 등 효행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효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선생은 청년시절에 이미 육경(六經)에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설렵하여 박학다식(博學多識)하기로 이름나있었다. 1579년 그의 나이 32세에 생원시 3등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었으며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현의 공부를 힘썼으니,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던 서애(西涯) 유성용(柳成龍)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보고 훌륭한 재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성균관 유생의 반열에서 선조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신의주까지 갔으며 이 공로로 선무랑(宣務郞)을 제수 받았다고 하나 실은 그의 평소 효심과 학행문장 재덕(才德), 그리고 강명정직(剛明正直)한 인격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략 까지를 높이 산 중신들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를 추천한 사람은 좌의정 유성용을 비롯하여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이정구(李廷龜) 응교(應敎) 신흠(申欽)등이었다.
한편 선생은 관하 백성들중에 효자?절부(節婦) 행의자(行誼者)가 있으면 몸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직접 포상하고, 자신을 청렴으로써 몸가짐을 하면서 이속(吏屬)들을 단속하니 그의 송덕(頌德)이 자자하게 인근 읍내까지 미풍(美風)으로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이 거창에 부임한 지 반년만에 뜻밖의 병을 얻어 사직도 못한 채 1608년 1월 별세하니 고을 사민(士民)들이 매우 슬퍼 히였으며 다음해 정월 고향으로 운구하여 내관동(內寬洞) 선영 아래 안장 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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