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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561

우리 고장이 낳은 명필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은 우아한 문장과 풍요로운 생활에서 법통있는 글씨를 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무르녹은 경지에서 청아한 일생을 마친 분이었다.
당대에 명필로 천명되어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인데도 공기골(孔洞?孔基?孔器) 같은 맑은 산골에 묻혀 살면서 자연을 상대로 품성 높은 차원에서 글씨를 연마했다. 그러므로 그의 서도는 심오한 사상과 고고한 경지에서 이뤄졌기에 저속한 안목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더불어 높은 수준에서 평가되어야 하고 우리나라 서도의 청맥을 찾아 낼 수 있어 글씨쓰는 사람들의 정신과 자세에 귀감이 되리라 믿는다.

상관면 죽림리에서 서쪽으로 나가 상관천을 건너면 공기골에 들어선다.
이삼만은 중년이 되자 이 골짝에 찾아 들어와서 그윽한 묵향속에서 필봉을 가다듬어 유수체를 이룩하였고 청고한 사상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다.


그의 관향은 전주로 젊었을 때 이름은 규환이었다.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는 것이다. 자는 윤원이요, 호를 창암이라 했는데 젊었을 적에는 강암(强巖)으로도 불리웠다.
그는 1770년(영조 46년)에 전주 자만동(현 교동)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때 정읍 불무곡에서도 거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글씨 쓰기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돌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점점 살림이 치폐되어 중년에는 공기골에 들어가서 처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독사에 물린 여독으로 작고하게 되자 그는 뱀이란 뱀은 눈에 띄는대로 잡아 죽이었으니 뱀막이로 이삼만이라 써 붙이면 뱀이 끓지 아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의 나이 53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했는데 슬하에는 딸만 셋이었고 가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77세 때 쓴 그의 서첩(書帖)에 의하면 우리나라 명필인 김생(金生)과 한호(韓濩) 같은 분을 추켜 올렸으니 그의 주체성을 살필 수 있는 것이요 글씨의 변천된 과정과 더불어 글씨쓰는 법통을 밝혀냈고 글씨쓰는 자세를 구명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을지라도 하루에 천자를 썼으며 늘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구멍내지 아니하고는 글씨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했다. 글씨를 배우러 찾아오면 한획 한점을 각각 한달씩 가르쳤다.

어느 분이 소장한 서첩에 의하면 해서(楷書)를 쓰는데 숙달하게 되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절로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여 글씨는 해서에 기초를 둬야 한다고 되풀이 했다. 또한 글씨쓰는 사람들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옛날 장해동이란 사람이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났으나 그가 죽고나서 배척된 고사(古事)를 들어 글씨쓰는 법도에 있어 후진들을 경계했다.
글씨는 도(道)의 경지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으로 인품이 고결한 연후에야만 묘경(妙境)에 들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글씨는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하고 소박한 기풍을 본받아야만 될 것으로 속기(俗氣)에 접어드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1847년에 향년 78세의 고령으로 주옥같은 맑은 일생을 마치고 구이면 평촌 하척부락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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