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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큰 공 세운 추수경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763

선생은 1529년에 태어나 1600년(선조 33년)에 죽었다. 그의 자는 청하이며, 호를 세심상이라 하였다. 그는 추계 추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선대는 중국 송나라 소흥 연간에 중국으로부터 배를 타고 함흥 연화도로 이주 하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수경은 오현군 성덕산 칠성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才藝가 뛰어나고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그의 나의 1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년)에는 중국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使)가 되었다.

그가 무강자사가 된 다음 해인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게 되자 그는 당시 명나라 구원병 이여송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의 두 아들과 더불어 그동안 통솔하고 있던 무강병사 5만명을 이끌고 1592년 12월25일 압록강을 건너 당시 왜적의 진지가 있던 곽산의 적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싸움에서 왜적에게 패하게 되자 개성으로 들어가 구원병을 청하고 흩어진 병사를 다시 규합하여 당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진주성으로 갔다. 그런데 진주성 전투에서 당시 조선군 지휘자 황진이 전사하고 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자 그는 왜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다시 전투지를 동래로 옮기었다. 그는 동래로 군대를 진격시켜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목을 마치 마대를 자르듯이 베었다. 그는 일찍이 그의 다섯 아들에게 훈계 하기를 『지원효충일대신(只願孝忠一代臣:다만 바라건대 효도와 충성을 하는 일대의 신하가 되라.)』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다섯 아들은 아버지 수경의 훈계를 지켰던 것이다. 그는 임진·정유 양 왜란이 끝나고 비교적 평온을 되찾게 되었던 1600년(선조 33년) 전주로 돌아와 그 해 9월 9일 그의 나이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당시 정부는 그의 상례에 필요한 물품과 제물을 준비하여 보내고 이정란(李廷鸞) 장군으로 하여금 상례를 성대히 치르게 하였다. 한편 조정은 그에게 정란공신의 훈을 내리게 하였다.

그가 죽은 뒤 다섯 아들들이 그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를때까지 까치 한쌍이 그의 묘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며, 또한 호랑이 두 마리가 매일밤 여막을 지켜 주었고 여막 앞 땅에 있던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3년상을 마칠때까지 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는 완주군 소양면 만덕산에 있다. 그의 묘소 옆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전가선대부궁내부부첨사(前嘉善大夫宮內府副詹事) 김병길이 글을 짓고, 글씨는 전숭록대부행이조판서원임규장각(前崇祿大夫行吏曹判書原任奎章閣) 윤용구가 썼으며, 비석의 뒤부분의 전서는 가선대부전향산수(嘉善大夫前香山守) 윤영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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