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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장(望巾匠) 임덕수(林德洙)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495

한평생을 오직 한가지 일, 망건(望巾) 제작에만 몸을 바치고 말총 한올 한올마다에 장인의 영혼을 불어 놓은 장인(匠人) 임덕수는 전국에서 유일한 망건장 기능보유자로 무형문화재 제66호였다. 
1903년 태어난 이래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381번지에서 줄곧 살아왔다. 
전주에서 봉동을 지나 호남고속도로로 익산인터체인지 쪽으로 비포장도로를 타고 4㎞쯤 가다보면 야산 줄기가 길게 뻗어내린 곳에 토담으로 겨우 몸채를 의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옛 농촌 가옥이 있는데 이곳이 임덕수가 태어나 한많은 한평생을 마친 우리나라 최고의 망건이 만들어진 곳이다.

임덕수가 망건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가 13세 되던 해 1916년 4월 20일의 사건 때문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그날 어린 나이에 땔나무 해오다 마을 뒤편 방죽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하면서 다시는 지게를 지지않겠다고 다짐하고 어머니로부터 망건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친정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솜씨로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망건장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매일 같이 자상하고 섬세한 가르침을 받은 임덕수는 타고난 눈썰미와 손재주에다 손 끝에 피가 터져 나오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10년 뒤에는 전국에서도 인정받는 기술을 얻었다. 

1930년대의 망건 한 개 값은 쌀한가마니와 맞먹는 5원이었으며 한달에 5개 또는 6개씩은 만들어 팔 수 있었으나 논밭 한평 없는 처지에서도 생계에 다소 여유가 있기도 했다. 특히 추석이나 설명절 무렵에는 수요가 많아 주문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지금은 쓰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현대문명의 뒷켠에서 골동품으로 인식이 되어가는 망건이지만, 당시에는 밥을 굶어도 망건을 써야 했던 소중한 물건이었으며 남자들의 권위가 가득 담긴 상징적 의미도 있는 선비들의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망건 만드는 일이 당시의 직업 가운데서 괜찮은 생업이기도 했다. 

망건은 관(冠)과 입(粒), 탕건(宕巾) 속에 두르는 것으로 왕과 왕족은 뒤에 비취관자를, 정3품이상의 양반은 금관자를 종3품부터 종9품까지는 수각(獸角)관자를, 그리고 천민과 상민들은 짐승뼈의 관자를 달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망건 위에 관을 쓰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망건이 관을 겸하게 돼있어 그 위에 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손끝으로 80여년 삶을 다스려온 그는 1985년 1월 25일 85세의 나이로 외고집 인생을 맺었다. 생전에 막내며느리 강점순씨등 3명의 제자가 그에게서 망건 제작 기술을 전수 받으며 뒤를 잇대고는 있지만, 갈퀴같이 굳은 손으로 5백년 전통을 살려내는 마지막 망건장의 솜씨는 다시 볼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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