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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詩文)에 뛰어난 홍남립(洪南立)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514

선생은 1606년(宣祖 39년)2월 26일 완주 구사리(九思理)에서 홍택(洪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탁이(卓爾)이고, 호를 화곡(華谷)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과 교우(交友)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6경(六經)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1633년(仁祖 1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하였다. 그 뒤 그는 벼슬길에 올라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거쳐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성균관학유·학정·박사·전적(成均館學諭·學正·博士·典籍) 등을 역임한 뒤 임금의 특별 배려에 의해 자기의 집에서 쉬면서 책을 복 수 잇는 사가호당(賜暇湖堂)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며,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을 거쳐 광양현감(光陽懸鑒)·만경현령(萬頃縣令)·평안도사(平安都事) 보성·서산·덕산 군수등의 외직(外職)을 거쳐 형·병조좌랑(型·兵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 등 숱한 내외(內外)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효행도 남달리 깊었는데 그의 부모가 돌아가심으로 묘소 옆에 여막을 3년복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러하였으니 친구와의 우의(友誼)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친구 백석(白石)유집과 함께 과거를 보러가서 시아우들이 일찍기 죽자 그들이 낳은 아들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들처럼 돌보아 주었으며 항상 자신의 아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선생은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자녀들의 강학(講學)에 힘썼다. 또한 그는 문인(文人)들을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여 문인들이 시(詩)와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항상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잘못된 곳을 올바른 지적을 해주었고, 잘된 곳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선생은 문인(門人)과 자녀들을 강학하는데 힘쓰다가 1679년 세상을 뜨게 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의 묘소는 완주 대승동(大勝洞)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덕행(德行)과 학행(學行)을 기려 학천사(鶴川祠)와 대승사(大勝祠)를 짓고 여기에 그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선생이 저술한 많은 문집(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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