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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사(義士) 국영환(鞠榮煥)

  • 작성자관리자
  • 등록일2010-07-06 00:00
  • 조회수1667

국영환(鞠榮煥)은 서기 1871년(고종 8년)현재의 화산면(華山面) 운곡리(雲谷里) 봉산에서 출생하여 1939년에 죽었다. 그의 자(子)는 영화(永化)요, 호는 곤암(坤庵)이다. 그의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당시 어장(御將) 조영하(趙寧夏)에게서 병서(兵書)를 배웠다. 1894년 당시 일본세력이 점차로 우리 나라에 침투해 들어오므로써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정권이 득세 하였으며 이어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면서 친일파가 완전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원군이 다시 등장 일본을 견제 하고자 러시아에 접근하므로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궁궐을 방화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더구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궁궐을 불법으로 침범하고 특히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손에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가 죽게 되자 국영환은 이에 격분, 일본인에 대항하여 항거했고 뒤에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군(東學軍)에 가담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을 누비며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당의 전국 체포령과 아울러 그를 수배 체포하게 하였다.
그는 이를 피하여 중국 심양(瀋陽)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독립운동을 꾀하고자 비밀리에 귀국 하였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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